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(고려 제3대) (문단 편집) === 즉위 전 === 태조의 3남이지만 둘째 형인 [[왕태(고려)|왕태]]가 [[요절]]했기 때문에 사실상 차남 대우를 받았다. 혜종 1년에 세워진 [[강원도]] [[영월군]]의 '징효대사탑비'에는 '왕요군'(王堯君)으로 등장한다. 동생은 '왕소군'(王昭君)으로 등장. 청단궁주, XX대왕, 필영대왕 같은 왕족과 [[왕규]], [[왕순식]]의 두 아들 등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. [[왕자]] 시절 별다른 작호를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즉위하는 [[광종(고려)|왕소]]의 동복형으로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형인 [[혜종(고려)|왕무]]와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. 선대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대비책이 별로 없었다. [[박술희]], [[왕규]]와 같은 친위 세력을 빼면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종은 어머니, 장인, 누이뿐만 아니라 [[왕식렴]] 등 막강한 지지 세력을 앞세워 혜종의 세력을 위협했다. 게다가 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[[정종(고려 3대)|왕요]]와 [[광종(고려)|왕소]] 형제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혜종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. 그뿐만 아니라 그 세력 내부에서도 박술희가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분열을 거듭하며 위기를 키워갔다. 혜종은 그 외가인 [[나주 오씨]] 가문이 왕건의 다른 아들들의 [[가문]]에 비하면 무척 한미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록 [[보위]]에 올랐다고 해도 늘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자신을 [[암살]]하려 한 [[자객]]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. 아마도 배후 세력이 밝혀지는 것과 무관하게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혜종 입장에서는 함부로 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. 반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을 감추지 않고, 의욕적으로 [[왕권]]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듯하다.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[[역적]]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하게 보위에 올랐을 정도로 기반과 세력이 강성했다. 정종은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[[충주시|충주]]의 대호족 [[유긍달]]의 딸 [[신명왕후|신명순성왕후]] 유씨의 소생으로,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며, 처가 또한 [[후백제]]의 부마였던 [[박영규]]와 [[견훤]]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[[문성왕후]]와 [[문공왕후]]의 집안이었다. 그중 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[[경춘원군]]을 두었다. 동복누이인 [[낙랑공주(고려)|낙랑공주]]가 [[경순왕]]에게 시집을 가서 전체적인 세력 기반만 놓고 보면 형 혜종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했다.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왕요(정종)를 혜종이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. 이복형인 혜종이 이른 나이에 붕어하자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과 [[평양시|서경]]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했다. 왕실 종친인데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. [[흥화궁군]]이라는 혜종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왕요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. 왕요(정종)의 배후 세력을 종합하면: * '''태조의 사실상 차남이란 혈통.''' * '''어머니와 충주 호족.''' * '''누이와 처남과 구(舊) 왕실.''' * '''작은 아버지 왕식렴과 서경 세력.''' * '''처가와 구(舊) 백제 세력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